Skip to main content
In many ways, parenting adult children starts when the kids are quite small.

성인이 된 자녀와의 관계를 돌아보는 것은 보람된 일일 것이다. 자녀가 성장하고 독립을 경험하며 자립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멋진 일이다. 하지만 이 시기는 쉽지 않다. 이 시기에 겪는 많은 어려움들은 지금 시대에만 있는 독특한 것이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어떤 어려움들은 말 그대로 수천 년 묵은 것이기도 하다.

마가복음 3장에는 자주 언급되지 않는 구절이 하나 있다. 마가는 예수께서 사역을 시작하기까지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마가복음의 첫 번째 이야기는 세례 요한의 사역에 관한 것으로.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3장을 읽을 때면, 이미 예수님은 가르치시고, 사람들을 고치시며,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고, 열두 제자를 임명하신다. 우리는 이 짧은 구절들을 많이 접했다. 마가가 마가복음 첫 몇 페이지에 얼마나 많은 내용을 담았던지 놀라울 따름이다. 그러고 나서 마가복음 3장 20절부터 이런 내용이 나온다.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몇 구절 후에 예수님의 가족이 등장한다: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곳에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을 집으로 데려가려고 왔다는 점은 흥미롭다. 성인 자녀를 둔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마리아도 아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걱정하고 있었던 듯하다.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자녀가 법적 성인이 되었다고 해서 우리의 양육 본능이 자동으로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인이며 부모로서 우리의 임무는 어느 정도 끝이 났다. 따라서 모든 전환기가 그렇듯, 새로운 역할로 인해 모두에게 힘든 시기가 찾아올 수 있다. 그들은 여전히 우리 자녀지만 더 이상 자녀가 아니다. 이제 우리는 그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까?

역사상 지금 이 시기에 성인 자녀를 양육한다는 것은 몇 년 전과는 다르다. 통신과 소셜 미디어의 발달로 자녀와 쉽게 연락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청년을 둔 부모는 지금의 청년들처럼 부모와 쉽게 연락할 수 없었다. 거의 모든 사람이 휴대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많은 청년들이 멀리 떨어져 있어도 부모와 자주 대화(또는 최소한 문자)를 주고받는다. 이러한 변화가 청년들의 자립에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지, 아니면 청년들이 성인으로서 결정을 내릴 때 부모의 의견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만드는지의 여부는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양육 단계의 목표는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자녀가 주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노력하는 독립적이고 제 몫을 하는 성인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가 그 목표를 단숨에 달성하는 마법의 과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자녀 중 일부는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청년으로서 제 몫을 못하는 반면, 어떤 자녀는 엄청난 실패에도 불구하고 매우 잘 해낼 것이다. 이 새로운 인생의 단계를 헤쳐나가는 동안 하나님께서 계속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녀의 나이와 관계없이 그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어한다.

다음은 우리가 직접 자녀를 키우며 배운 것과 다른 부모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배운 것들이다.

성인 자녀를 키우는 일은 일찍 시작된다. 성인 자녀를 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인이 된 자녀에게서 보이는 성격적 특성이 훨씬 어렸을 때부터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어른이 되면서 성숙해지기도 하지만, 돌이켜보면 성인이 된 자녀의 많은 부분이 어렸을 때부터 있었다. 따라서 여러 면에서 성인 자녀의 양육은 어릴 때부터 시작된다.

어떤 의미에서 육아는 놓아주는 행위의 연속이다. 아이를 볼 때 얼마나 가까이서 봐야 하는지 생각해 보면, 두 살짜리와 네 살짜리는 그 차이가 상당하다. 자녀가 성장함에 따라 우리는 그들이 점점 더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 과정의 자연스러운 마지막 단계는 성인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다. 놓아주는 과정은 자녀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잘 시작해야 한다.

우리 딸이 대학 1학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전화가 와서 아프다며 자기가 수업에 가야 할지 말지 물었다.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지만 여전히 우리의 의견을 원했다. 그런데 그해 말에는 더 이상 결정을 내릴 때 우리의 의견이나 허락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가 아는 어떤 가족은 중학생 자녀에게 옷을 직접 구매하고 세탁하게 함으로써 이 시기를 신중하게 준비했다. 각 가정과 자녀는 이 중요한 전환을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신만의 방법을 생각해 낼 것이다.

성인이 되기 전에 자녀와 맺은 관계는 자녀가 성장한 후에도 영향을 미친다. 또한 자녀의 신앙 여정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어린이와 청소년 자녀는 여러분을 보며 어른이 되는 법을 배운다. 여러분이 배우자를 대하는 방식은 자녀가 미래의 중요한 사람을 포함하여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법을 배우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다른 사람과 의견을 달리하는 방식, 돈을 사용하는 방식, 자녀를 대하는 방식은 모두 자녀가 어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가는 데 중요하다. 신앙과 일상생활이 이질적인 두 가지가 아니라 하나의 전체로 통합된 사람이 되는 모범을 보이라. 훈계나 인위적인 방식이 아닌, 신앙이 일상의 결정과 장기적인 목표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고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대화에 녹여낸다면, 자녀는 자연스럽게 신앙과 일상생활을 통합하는 법을 보게 될 것이다.

한 가지 사이즈가 모두에게 맞지는 않다. 모든 부모는 자녀마다 양육 방식을 달리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는 자녀가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어린 자녀가 저마다 다르듯이 성인이 된 자녀의 상황도 서로 다를 것이다.

앞서 아픈데 수업에 결석해도 되는지 조언을 구했다는 딸에겐 쌍둥이 동생이 있다. 그 아이는 한 번도 그런 조언을 구한 적이 없다. 대학생 때 단핵구증 진단을 받았을 때도 전화로 “전 괜찮아요. 안내 책자를 받았어요."라고 하는 게 전부였다. 이 두 아이의 다른 반응은 같은 환경에서 자랐어도 성인이 됐을 때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지며 서로 다른 유형의 부모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모든 요소는 성인 자녀와 관계를 맺는 방식에 차이를 가져온다. 어떤 자녀는 완전히 독립적인 반면 다른 자녀는 정서적 지원, 재정적 지원 또는 삶의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필요할 수 있다. 집을 떠난 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집에서 계속 같이 사는 자녀를 양육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를 것이다. 이러한 모든 차이점에 접근하는 데 있어 최선의 방법이란 없다.

관계에 우선순위를 두라. 자녀가 재밌고 밝게 자라나 함께 있으면 즐거운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을 보는 것은 육아의 기쁨 중 하나이다. 하지만 아동기에서 성인기로 전환되며 부모와 자녀 관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자녀들은 대학 전공을 결정하는 것부터 직장을 찾는 것까지 인생에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중요한 연인을 만날 수도 있으며, 이는 인생 전체에 또 다른 복잡한 층을 추가한다. 여러분은 그들이 기꺼이 허락하는 만큼만 그들의 삶의 일부가 될 수 있다. 그러니 그들이 여러분을 쉽게 초대할 수 있도록 하라.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보라. 그들이 관심 있는 것에 대해 물어보라.

여러분이 그 나이였을 때를 기억하는가? 여러분의 삶은 바빴다. 사회 초년생이었고 아마도 중요한 관계를 막 시작했었을 것이다. 자녀들도 전환기에 있는 자신의 삶에 매여 있기 때문에 전화를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부모가 상관없기 때문이 아니다.

연락을 잘 받아주고 격려해 주라. 부모의 인정을 받는 것은 성인이 된 후에도 여전히 중요하다. 청년들은 부모가 자신을 자랑스러워하기를 원한다. 그들은 지지와 사랑, 격려를 받을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을 알고 싶어 한다. 따라서 부모가 격려를 아끼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비판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고, 부모의 비판은 오랫동안 마음에 남는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우리가 중립적으로 한다는 말이 자녀에게는 비판으로 들릴 수 있고, 원치 않는 조언은 “더 잘해야 한다”는 의미로 들릴 수도 있다.

한 친구의 말처럼 “우리는 조언을 해 달라고 할 때 조언을 해 준다. 하지만 아이들이 우리의 인정을 원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격려할 때는 진정성 있게 하라. 긍정적인 말로 꾸며내라는 것이 아니라, 자녀가 잘하고 있는 것을 본다면 그것을 말해 주라. 우리 중 누군가는 자신이 얼마나 자기 자녀를 자랑스러워하고 있는지 자녀가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겠지만, 그것을 말로 전할 때 자녀에게는 더 큰 의미가 있다. 역학관계가 작용하기 때문에, 자녀들은 우리가 말하려는 것을 항상 비판 없이 들을 수는 없다.

성인 자녀의 부모가 된 것은 우리에게 기쁨이다. 우리 자녀들은 모두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같이 있으면 좋은 사람들이 모두 되었다. 특히 자녀들과 모두 계속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부모로서 수년 동안 배운 것 중 가장 중요한 교훈은 자녀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관계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교훈은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신앙을 권면하라. 데이터에 따르면 오늘날의 청년들은 이전 세대만큼 교회에 많이 출석하지 않는다. 많은 청년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그들이 기꺼이 헌신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모든 크리스천 부모는 자녀도 신앙인이 되기를 바라지만, 교회 출석에 대해 잔소리를 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수치심을 줘서 교회를 간 사람이 유익을 얻는 경우는 거의 없다. 교회 출석은 신앙을 나타내는 하나의 지표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모든 걸 말해 주진 않는다. 자녀가 교회와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좋을 수도 있다. 따라서 자녀가 원하는 방식으로 신앙을 실천하지 않는다고 해서 꾸짖지 말고 계속해서 신앙의 본을 보이고 신앙에 대해 이야기하라. 한 친구는 부모로서 때때로 그냥 “닥치고 기도”해야 할 때가 있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우리나 자녀가 신실하지 못할 때에도 변함없이 신실하시다. 기도는 자녀를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로 돌아오게 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가장 좋은 방법이다. 우리가 세례 때 들었던 약속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행인 것은 많은 청년 자녀들이 교회에 남아 신앙을 삶의 중심으로 삼고, 교회에서 리더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이 시대에 신앙인이 되는 방법에 대해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줄 것이다. 하나님은 여러 세대에 걸쳐 교회를 이끌어 오셨고, 다음 세대와 그다음 세대에도 계속해서 교회를 지켜보실 것이다.

 

토론 질문

  1. 성인 자녀를 양육했던 경험, 혹은 성인이 되어 부모의 양육을 받았던 경험은 어땠나요? 대부분 긍정적이었나요, 아니면 부정적이었나요?
  2. “어떤 면에서 육아는 놓아주는 행위의 연속이다” 놓아주는 것이 어려웠나요? 아니면 부모님이 놓아주기 시작할 때 힘들었나요? 왜 그랬나요?
  3. 부모님이 비판적이었다고 느끼나요? 아니면 격려를 많이 하셨다고 느끼나요? 부모인 경우, 자녀에게 격려를 해 왔다고 생각하나요? 아니면 비판적이었다고 생각하나요? 예를 들어 설명해 주세요.
  4. 자녀가 “부모가 원하는 방식으로 신앙을 실천하지 않아서” 꾸짖거나 훈계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요? 아니면 그러한 훈계를 받은 적이 있나요? 그 기저에 깔린 두려움이나 좌절감은 무엇인가요? 어떻게 하면 그런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We Are Counting on You

The Banner is more than a magazine; it’s a ministry that impacts lives and connects us all. Your gift helps provide this important denominational gathering space for every person and family in the CRC.

Give Now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