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따져보든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최근에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드러난 이 세상의 취약성이 이 단순한 진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항상 무언가와 씨름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우리는 집단적으로 이러한 문제들을 무시해 왔습니다.
나는 최근 한 교회 중고등부에서 대중 음악에 대한 강연을 했다.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는 마음과 관계의 총체적 변화가 필요합니다.
우리 사회의 다른 많은 분야가 그렇듯이 교회도 팬데믹으로 인해 변했습니다
각 그룹 내의 중도파는 대개 가장 취약하고 소외됩니다.
저는 최근 들어 이런 시기에 얼마나 소망을 잃기 쉬운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의 소망은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얽힌 실제적이고 복잡한 문제까지도 대부분 지식적으로 접근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만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과학기술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도 포함됩니다.
우리는 성경 한 구절에서 마음에 드는 절반만 취하고 나머지 절반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야망은 현재를 보는 시각을 흐리게 하고 하나님께서 매일 베푸시는 축복을 간과하게 합니다.
마태복음 2:13-15은 예수님의 탄생 이후 마리아와 요셉의 이집트 여행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리가 자신의 영적 교만을 충족시키기 위해 성경을 길들여왔는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여기 최소한 세 가지 주된 징후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지난 몇 년 동안 사회적 병폐, 갈등 및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닥친 도전들로 이루어진 긴 목록 중의 몇 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가 물리적으로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있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한 몸으로 묶여지는 것이 가능합니까?
제가 보기에 기독교 영성은 전인적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로서 타락한 창조세계에서 살라고 초청하십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 봅시다.
비록 2013년 보고서에서 다루었을지라도 저는 이러한 두려움들이 얼마나 공개적으로 인식되어왔고 북미주 개혁교회 리더들이 얼마나 투명하게 씨름해왔는지 궁금합니다.
지난 5월 브리티쉬 콜롬비아 캠룹스에 있는 원주민 어린이 기숙학교 부지에서 215구의 무명의 어린이 시체가 묻힌 것이 발견된 소식이 캐나다를 뒤흔들었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수많은 행사에서 저는 코로나 바이러스 및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큼직한 사건들을 돌아보았습니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우리 주변 환경의 변화의 증거 뿐 아니라 개인의 태도와 행동의 변화 또한 보게 됩니다.
우리가 자부하는 교단 전체의 장점들이 교인 감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지금쯤 다 해결되었어야 하지 않을까요?